김충현(1921.4~2006.11)은 서예가 이전에 교육자였고 붓을 통해 국어 사랑을 실천한 선각자이다.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충현은 경성 삼흥보통학교와 중동학교를 졸업했으며,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1942년 일제의 조선인 민족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하였고,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한 한글 고체를 선보였다. 궁중에서 쓰던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한글 서예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1947년 최초의 한글비문인 「유관순 기념비」를 썼다.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다수의 유적지, 공공건축물 현판을 썼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한강대교」, 「동호대교」, 경복궁 「영추문」과 「건춘문」등이 있다.
경동공립중학교, 경동고등학교 국어교사와 오산학교(梧山學校) 이사장을 역임하고, 서실 겸 작업실인 일중묵연(一中墨緣)과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를 연 그는 평생에 걸쳐 서예 교육에 힘썼다. 그는 도제식이 아닌 체계적인 교육방식으로 제자들이 옛 명필들의 글씨를 익힐 수 있도록 지도하며, 청출어람의 꿈을 꾸게 만든 참 스승이었다.
“나는 글씨를 가르치는 데 있어 절대로 내 글씨를 모방하지 않도록 지도한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은 자칫 선생의 글씨대로 흉내 내기 쉬워지기 마련이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내 글씨를 본받지 않도록 주의를 주곤 한다. 대신 제자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옛 명필 글씨를 되풀이해서 연습케 하고 있다. 내 글씨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서예에 있어 재주가 더 뛰어난 사람이지라도 내 글씨만 흉내 내다보면 결국 나의 아류가 될지언정 나보다 더 나은 글씨를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고로 예도에 있어 스승은 제자가 자기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법이라 나도 나보다 훌륭한 서예가가 제자 중에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 본 적이 없다. 고대의 명필 글씨를 섭렵하다 보면 비록 내 제자 중에서도 나보다 나은 서예가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일이다.”
「정읍사(井邑詞)」, 「한림별곡(翰林別曲)」,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백범 김구선생 묘비」, 「이충무공 한산도 제승당비」, 「3.1정신 찬양비」 외 다수
『우리 글씨 쓰는 법』, 『궁체와 고체연습』 외 다수
2006 | 작고 |
1988 | 예술의 전당 개관 10주년 기념 초대전 |
1987 | 문화훈장 서훈 |
1985 | 예술원상 수상 |
1983 | 백악미술관 설립 |
1983 |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
1981 |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
1976 | 국전 운영위원 |
1969 | 일중묵연 개설 |
1960 | 전 심사위원 (~1973) |
1949 | 제 1회 국전 초대작가 |
1948 | 문교부 예술위원 |
1943 | 중등학교 졸업 |
1942 | 『우리 글씨 쓰는 법』 저술 |
1938 |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남여학생작품전’최고상 수상 |
1921. 04. 02 | 출생 |